군산/군산 이야기

통근열차 (펌글)

관음죽_ 2010. 6. 18. 22:58

기적소리 울리며 달리던 '군산행 통근열차'를 아시나요

 

길이 있다. 길은 점점 자라나 둘 혹은 셋으로 갈라진다. 손금에 관한 이야기다. 운명을 믿지 않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은 우리의 현재다.

기찻길 옆 빈 주택들

전북의 문화콘텐츠에는 정작 현재 전북인의 일상은 없다. 생활문화였던 것들이 전통의 이름으로 재교육되면서 '할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사라졌다. 최근의 문화콘텐츠에서 오래된 미래를 볼 수 없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아마도, 우리는 너무 먼 곳을 그리워하는 지도 모른다. 백제문화의 자부심과 조선시대의 정신적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도.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희푸르게 번쩍이는 쌍줄의 선로는 대기가 소유한 예리한 칼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상이 쓴 장편소설 「12월 12일」의 한 대목이다. 전주-군산 간 신작로와 연결된 군산선은 식민지 근대를 직조한 씨줄과 날줄이다. 기차를 통해 근대의 충격을 담아낸 천재시인 이상의 글처럼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는 전통적인 공간을 단축시키고 지역적으로 다르게 흐르던 시간을 통일했다. 철도로 연결된 지역은 국가와 민족으로 상상된다.

군산선은 잊혀진 아버지의 길이다. 2007년 운행을 중지한 군산행 통근열차의 궤적에서 우리지역의 근대문화콘텐츠를 벨트화 할 가능성을 본다. 아직까지 기차의 역사적 콘텐츠를 실제생활과 접목한 예는 없다. 경기도에 위치한 철도박물관은 퇴역한 기관차를 모아놓은 거대한 집하장이며 전라남도 곡성의 철도마을도 섬진강을 활용한 레저문화에 맞춰져 있다. 현재 운행이 중단된 군산선이이야말로 근대성을 살릴 좋은 콘텐츠다. 일제강점기의 기차표와 기차시간표, 객차 안에서 다반사로 피워대던 담배와 성냥갑 등 근대화와 함께 밀려온 일상의 소품들로 폐역이 된 군산선의 간이역들을 상상한다. 역들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처럼 잊혀진 근대 퍼즐을 하나씩 맞춰보는 여행. 같이 가보자.

▲ 근대를 여행하는 증기기관차

(위부터)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임피역사, 1912년에 놓여진 군산역앞 철길,

길이 있다. 지구를 퍼진 거미줄 같은 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차여행은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문화적 컨셉을 분명히 한다. '유럽의 지붕'이라는 뜻을 가진 스위스의 <융프라우 등산열차>와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기차>, 아프리카의 <블루 트레인>은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차창 안에서 즐길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 한번은 꼭 타보고 싶어 한다.

역사콘텐츠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철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 기차>는 레닌이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유명해진 열차. 일본의 경우 역사콘텐츠에 문화적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결합한 사례다. 큐수의 구마모토를 오가는 <아소보이호 기차>는 디지털시대를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운행한다. 객실 천장에는 팬이 돌아가고 나무로 된 복도와 의자들은 옛날식 찻집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유후인의 숲'이라는 뜻을 가진 <유후인 노모리 기차>는 만화적 감성으로 운행되는 것이 특징. 각 지역의 명소를 지날 때마다 승무원들이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며 사진도 찍어준다. 기차를 교통수단을 넘어선 문화콘텐츠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의 절정은 대합실에 자리한 족탕코너. 기차를 기다리며 인근 지역을 여행한 피로를 풀라는 배려다.

최근 일본의 기업들은 정년퇴직자의 연령대에 맞춰 추억상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움직이는 호텔'이라 불리는 <카시오페이아 열차>는 '은하철도 999'처럼 향수를 자극한다. 일본인이 유독 열차에 관심이 많은 것도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게 된 이유. 최근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지역에 일본인들이 자주 방문하는 것도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을 되새기기 위함이란다. 그들도, 어린 시절을 식민지 치하에서 보낸 우리의 아버지들도 인생의 노년을 정리하는 시기다. 이래저래 우리의 아버지들은 가 볼만한 곳도 여유도 부족하다.

▲ 만주행 대륙열차의 상상력

(위부터)군산역 내부 모습, 임피역사 내부 모습, 옛 군산역 전경

길이 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가던 만주행 대륙열차의 길이다. 열차 명칭의 변천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비둘기호가 월남파병의 유산이었듯 호남선을 달렸던 태극호와 전라선의 풍년호는 근대를 겪어낸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행 열차의 이름은 대륙호. 소설가 채만식이 타고 다녔을 익산-군산발 열차는 사라지고 지금은 장항선과 연결된 무궁화열차가 신군산역과 서천역을 잇고 있다. 한 때 신의주행 기차표를 팔았을 개정역은 이영춘 가옥과 구마모토 농장이 있던 곳. '신고산타령'으로 남은 철도의 속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개찰구를 근대열차의 전용게이트로 특성화하여 탑승객들에게 역사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어떨까? 옛 지명이 찍힌 기차표를 손에 쥐고 소설 아리랑의 한 부분을 듣거나 근대사를 듣는 것은 살아있는 역사체험이 될 것이다. 평양에서 신의주 거쳐 만주-봉천역행 열차표에 기념 스템프를 하나씩 늘려가는 기쁨은 보∼너스.

큐슈의 <철도박물관>는 체험이 바탕이 된 테마파크형. 메이지 시대(1909)의 객차 안에는 다다미로 된 의자와 당시 복장을 한 인형들이 과거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이곳의 특징은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는 장치. 실내에는 가상 전철운전장치(시뮬레이션)가 있고 밖에는 실재로 철로를 따라 미니열차를 운전해 보는 철도공원이 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다.

군산선의 간이역들이 근대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을 상상한다. 외국인만 탈 수 있었던 1등석에서 고풍스런 찻잔으로 차 서비스를 제공받고 만주로 떠나는 독립군과 기념사진 한 컷. 이렇게 군산선 일대는 근대 기차 박물관이 되어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길이 있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다. 이 곳을 지났던 기차가 이동수단이거나 수려한 볼거리를 지나가는 관광수단도 아니기에 곧 버려질 길이다. 근대화시기 철도에 대한 상상이 현재의 근시안적 사고로 폐기처분 될까 두렵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 익산역, 고도문화와 근대문화의 터미널

익산역은 11일과 관련한 두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1950년 7월 11일 미군에 의한 익산역 오폭사건과 1977년 11월 11일에 일어난 이리역 화물열차 폭파사건이 그것. 전 국민에게 '이리'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익산의 트라우마다.

익산역은 전라도 교통의 심장 같은 곳이다. 소설가 양귀자에게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 「숨은꽃」은 귀신사로 가기 전 익산역에 도착한 작가의 심경을 장문의 묘사로 시작한다. 그녀는 익산역에 다다라서 "이 길을 통해 나는 세상에 나왔었다. 한때의 기억들은 모두 이 길의 언저리에서 만들어졌다."고 익산역을 회상한다.

KTX는 2010년 4월 현재 6주년을 맞았다. 100년 전 지신(地神)을 깨운다고 하여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던 철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역세권 개발로 새단장을 한 익산역 어디에도 근대화와 함께한 철도의 역사는 없다. 대신 상업문화복합건물이 곧 들어설 예정이란다. 익산역이 가진 역사적 의미가 자본의 가치에 밀린 결과다. 이곳에 <기차테마파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최근 익산시는 미륵사지 복원을 계기로 익산역사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군산시는 근대문화유산의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자체 별로 추진하는 역사문화콘텐츠를 철도를 활용하여 전북의 서남쪽을 역사문화벨트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군산시와 익산시가 거시적 관점에서 만나야할 이유다.

길이 있다. 천 년 전의 길과 백 년 전의 길이다. 길은 만나고 헤어지면서 지역의 현재를 그려낸다. 백제의 도시 익산과 일제강점기의 도시 군산시가 각각 그리고 있는 우리지역의 손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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